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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정숙] [세상읽기] 문서에 기밀은 없다
소련사를 연구하려고 문서고에서 작업해본 사람들에게는 낯익은 문구가 있다. 스탈린 정권이 기밀로 분류한 문서의 표지에는 붉은색 굵은 도장 글씨로 “영원히 금지됨”이라는 구절이 찍혀 있다. 정치적으로 민감했음직한 내용의 문서뿐 아니라, 정권과 다른 정책론을 편 학자의 전문연구서에도 그런 도장이 찍혔다. 이견을 허용하지 않으려는 권력 의지의 표현이 이 문구였다. 그러나 “영원히 금지”됐던 문서들은 페레스트로이카 이후 개방되기 시작했고 금지됐던 이름들은 “돌아온 이름”이 되었다.

옛 소련 문서고에는 별별 문서가 다 있다. 문서 생산자의 관점에서 공훈담의 원천이 될 만한 문서도 있지만, 권력자에게 불리한 문서도 있다. 독재권력이라도 문서를 함부로 폐기하지는 않았다. 기밀문서 공개를 금지한 사람들은 스스로 이를 독점관리하기만 한다면 역사해석을 통제할 수 있다고, 과거를 지배함으로써 현재를 지배하고 미래의 권력까지 조종할 수 있다고 생각했으리라. 그러나 누구도 문서를 영구히 지배할 수 없다.

기밀문서 해제가 큰 파장을 불러일으킨 예는 많이 있다. 살바도르 아옌데 대통령 정부를 무너뜨리고 살육극을 초래한 1973년 칠레 군부쿠데타가 미국 중앙정보국의 지원을 받아 실행되었음을 기밀해제된 문서에서 확인한 것은 대표적인 경우다. 미국 국가의 이미지나 기관의 명성에 도움이 될 리 없는 사실이지만 기밀 기한이 지나자 공개된 것이다. 문서 생산자의 이익보다 인간사회의 궤적에 관한 진실 규명과 알 권리가 더 중요하다는 사회적 합의 때문이다.

한국에서는 최근, 국가기관의 과거사에 대한 진실규명이 진행되고 있다. 국정원, 국방부, 경찰청 등 국가기관에서 생산되어 기밀로 묶여온 문서들도 진실 규명에 활용되었고 의혹 사건들의 진상도 일부 밝혀졌다. 그러나 문서 공개는 제한적으로 이루어졌을 뿐이다. 자체보관 문서를 공개하지 않으려는 기관들의 태도가 장애였다. 문서가 정리되지 않아서 그럴 수도 있지만 조직의 명예에 도움이 되지 않는 문서는 공개하지 않으려는 태도가 가장 큰 원인이었다. 최근의 법률 개정으로, 기밀해제 기한이 되면 원칙적으로 모든 국가기관 문서들을 국가기록원에 이관하여 공개한다는 결정이 내려졌다. 늦으나마 다행스러운 일이다.

현대사 문서 공개와 관련하여 가장 예민한 부분의 하나는 이른바 “용공조작” 의혹 관련 문서들의 공개일 것이다. ‘인혁당’이나 〈민족일보〉 조용수 사장의 사형 같은 지식인 관련 사건은 세인의 관심이라도 끌었지만, 납북 어부로 북에 끌려갔다 온 뒤 고문 끝에 간첩으로 몰린 보광 스님(이상철씨)처럼 이름 없고 힘없는 국민들의 경우에는 본인 혼자 발버둥치다, 수사기록이 어떻게 조작되었는지 알지도 못한 채 포기하거나 세상을 뜨는 일이 허다하다. 고문으로 사건이 조작된 경우 긴 시간이 지난 후에는 고문 사실을 입증하기도 쉽지 않다. 하지만 적어도 수사기록 문서를 확보하면 의혹 규명의 출발점을 찾기가 용이해질 것이다.

현재 일각에서는 반인륜 범죄에 대한 공소시효 폐지 운동이 전개되고 있다. 과거사 관련 문서가 공개되더라도 국가기관의 조직적 범죄를 명확히 밝히기까지는 많은 시간이 걸릴 수 있다. 고문 가해자나 기록조작 당사자가 공적으로 미리 고백하고 용서를 빌면 형사소추를 당하거나 직장에서 불이익을 당하지 않게 하는 규정을 만들어 진실 규명을 촉진할 수 있지 않을까. 대선 정국이라는데, 보수정당이라도 이 문제에서 퇴행적 자세를 보여서는 안된다. 국가 기록문서는 문서 생산자가 영구히 통제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문서의 생산과정에 대한 평가까지 포함하여 모든 것은 공공의 평가와 해석에 맡겨져야 할 것이다.

한정숙 서울대 교수·서양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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