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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정숙] [세상읽기] 식량 무기화의 위험은 정말 없나?
[한겨레 2006-04-06 22:06]    



이제는 세인들의 기억에서 사라졌겠지만, 옛소련 체제를 흔든 치명적 취약점의 하나는 만성적 식량 부족이었다. 소련은 스탈린의 권력 장악 후 초고속 공업화 정책에 치중하면서 농업 집단화를 강행했다. 그 결과 공업 생산고는 올라갔지만 농업 생산고는 하락하였고, 농작물의 유통마저 심각한 문제를 드러냈다. 자국 농산물만으로는 공급 부족이어서 소련은 지구 최대의 땅덩이를 가졌으면서도 대량의 곡물을 외국에서 수입해야 했다. 미국·캐나다·오스트레일리아·아르헨티나 등이 주요한 식량 수출국이었다. 서방의 곡물수출-소련의 곡물수입이 잘 작동할 때는 문제가 덜하였다.

그러나 식량 수입국의 약점이 드러나는 상황이 도래했다. 소련이 아프가니스탄 전쟁을 일으키자 미국의 카터 대통령은 곡물의 소련수출 금지를 선언하였다. 냉전 상황에서 식량이 무기로 돌변한 것이다. 다른 곡물 수출국들의 호응이 미진했고 미국도 1년 만에 수출금지를 해제하였으므로, 심각한 기근사태가 벌어지지는 않았다. 그러나 국제적으로 회오리바람을 불러일으킨 이 사태의 와중에서 소련은 체면이 땅에 떨어졌고 체제의 신뢰도에 큰 흠집이 가기 시작했다.

국제관계에서 식량과 석유 같은 필수품목이 무기가 된 것은 어제오늘 일이 아니지만, 최근 동시다발적으로 벌어지고 있는 일련의 사태를 볼 때 우리의 인식지평 안에는 식량 무기화라는 문제가 들어 있는가 하는 기본적 의문이 들었다.

한-미 자유무역협정(FTA)은 금융·의료·법률 등 서비스 부문과 교육시장 개방 같은 중대한 내용들을 안고 있지만 그 사실이 제대로 인식되지 않고 있다. 조직적 저항을 하고 있는 주된 집단이 영화인과 농민이기 때문에 두 부문의 개방문제만 그런대로 관심을 끌고 있다. 정부의 태도는 이들의 저항에도 요지부동인데, 한-미 자유무역협정은 필요하고 바람직하다고 보는 찬성론자들의 여론몰이 효과를 믿기 때문이다. 그런데 농업시장 개방 문제는 농민들의 생존권이라는 절박한 문제와 함께 식량안보라는 관점에서도 생각해야 한다.

식량안보 운운한다고 해서 당장 먹거리 확보 자체가 어려워진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세상에는 식량 자급국이 아닌 나라도 허다하다. 그러나 주곡 자급에서 주곡 수입으로 전환할 때는 모든 가능한 위험요인을 다 고려했는지 자체를 묻고 또 물어야 한다. 농업 기반이 파괴되고 주곡의 상당 부분을 수입에 의존하는 사회는 국제관계에서 자신의 의지대로 선택하고 결정할 수 있는 입지가 현저히 좁아지기 때문이다. 더구나 한반도는 국제정치적 갈등의 핵심 지역이 아닌가? 이미 한국은 석유 확보와 북한 핵문제의 평화적 해결이라는 구실 때문에 여론의 반대를 무릅쓰고 이라크에 파병하였다. 그렇다면 주곡의 자급비율이 더 낮아졌을 때 식량까지 한국의 선택을 제약하고 고비마다 목을 옥죄는 구실을 하지 않으리라고 장담할 수 있을까?

한국 정부는 주한미군이 이른바 전략적 유연성 개념의 적용 대상이 된다는 데 합의했다. 이는 한반도를 언제 어떻게 우리 자신의 문제와 상관없는 분쟁의 소용돌이로 몰아넣을지 모른다. 게다가 북핵문제의 평화적 해결 기미는 여전히 보이지 않는다. 이런 상황에서 한국이 한반도 문제를 평화적으로 해결하고, 국제사회에서 평화세력으로 존립하고자 할 때 식량문제가 석유문제보다 더한 저해 요인이 되지 않으리라는 보장이 있을까?

국민은 몰라도 된다는 듯이, 국민은 단지 정책의 객체이기만 하다는 듯이, ‘비밀리에 서둘러’ 진행되고 있는 한-미 자유무역협정 협상과정을 보면서 식량 문제로 절박한 심경을 토로하곤 하던 고르바초프 옛 소련 공산당 서기장의 모습을 떠올린 것은 쓸데없는 짓이었기를 간절히 바라고 또 바란다.

한정숙 서울대 교수·서양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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