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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정숙] [세상읽기] 실미도와 북한 미사일

[한겨레]2006-07-21 06판 30면 1751자

‘실미도 공작원’ 사건의 진상이 공개되었다. 이를 조사한 국방부 과거사 규명위원회가 관련자에게 증언을 강제할 조사권을 가지지 못했기에 끝내 확인하지 못한 부분도 더러 있었으나, 사건 본질은 대체로 밝혀졌다. 실미도 사건은 그 자체도 워낙 비극적이었지만, 더 큰 관심을 가지고 볼 것은 배경이 된 남북 대립의 전반적 상황과 국제관계다.

알려졌다시피 실미도 부대는 1968년 1월21일 북쪽이 남쪽에 124부대를 파견해 대통령 암살을 기도하자 그 대응으로 창설됐다. 당시 남북은 서로 비밀공작원을 파견하며 불안을 조성하는 험악한 관계에 있었다. 미국은 월남전(베트남전)에 매달렸던 때였다. 휴전선이 뚫리고 ‘무장공비’가 청와대 1킬로미터까지 이른 사태에 한국 사회는 깜짝 놀랐고, 격분한 정부는 동일한 방식의 보복을 구상했다. 그래서 김일성 북한 주석 거처 습격의 임무를 띤 실미도 공작부대가 창설됐다.

그런데, 실미도 공작원들은 북파되지 않았고 남북 관계도 파국으로 치닫지는 않았다. 북한이 68년 1월23일 미국 정보함 푸에블로호를 나포해 끌고가자, 80여명 선원의 안전 귀환을 위해 ‘즉각 협의’ 방침을 택한 미국 민주당의 린든 존슨 대통령 정부가 ‘즉각 보복’을 주장하는 한국 정부의 대응을 강력히 말렸기 때문이다. 이후 월남에서 고전하던 미국은 대외정책의 틀을 긴장완화로 바꿨고, 남북도 72년 7·4 공동성명을 향한 교섭의 길로 나섰다. 방치된 채 푸대접받던 공작원들이 자기네 사정을 알리고자 택한 서울행이 자폭이란 비극으로 끝난 것은 안타까우나, 남북 유혈분쟁이 벌어지지 않은 것은 천만다행이었다. 이처럼, 극한 대결로 얼룩졌던 상황에서도 누군가 분위기를 조정하면 파국을 막을 수 있었다. 당시에는 오히려 미국이 이 역할을 했고, 한-미 관계는 이 때문에 마찰을 빚기도 했다.

지난 5일 북한의 미사일 발사로 동북아의 긴장이 높아졌다. 지난해 9월의 6자 회담 합의로 북핵 문제 해결 희망이 드높았는데, 그 직후 시작된 북-미 갈등이 고조되다 오늘에 이르렀다. 북한은 미국이 1·21 사태 때 월남전에 묶여 있었던 것처럼, 지금은 이라크전에 묶여 미사일 발사에 강경 대응할 수 없으리라 판단했겠지만 사태는 달리 진행되고 있다. 유엔 안보리는 만장일치로 북한 제재를 결의했다. 북한은 바깥세상을 이해하기 위해 더 노력해야 하는데도 자신의 상처에만 집중하여 외로운 행보를 강행하고 있다. 한국 정부도 강경책을 보이고 있다. 미사일 발사에 항의하는 것은 동북아 평화를 고려해 필요하지만, 식량·비료 같은 인도적 지원마저 중단해야 할까? 대북 접촉의 끈이 하나둘 끊어지고 있으니 문제다.

북한도 단일한 집단이 아니고 내부에 강경·온건 노선 차이가 있을 것이다. 북한 강경파와 미국, 일본의 강경파가 서로 이용하며 날선 대립으로 사태를 몰아가고 남북관계마저 경색되면 북쪽 개방세력은 입지가 더욱 좁아지지 않을까?
북·미·일 정치지도자들의 자존심 싸움으로 국민들 감정만 나빠지고 있으니 서글프다. 1·21 사태 같은 것도 ‘조용히’ 해결했는데, 인명손실 없이 소리만 요란했던 미사일 발사 사태는 좀더 빨리 해결해야 한다. 중국이 북한을 가라앉히는 데 한계가 있다면, 역발상으로 미국과 일본내 평화세력이 나서도록 한국이 힘써야 할 것이다. 지미 카터, 빌 클린턴 전 미국 대통령 같은 이가 특사로서 동북아 평화를 위한 전체 틀을 다시 짤 수 있도록 대화 분위기를 만드는 것은 불가능할까 생각해 본다. 그리고 한국은 인도적 지원을 재개해야 할 것이다. 김대중 전 대통령도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었으면 한다.

한정숙/서울대 교수·서양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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