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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정숙] 기억, 책임 그리고 미래
한겨레신문  2005. 3. 31


역사는 인간의 과거를 다루되 기억된 과거를 다룬다. 기억은 문서 형태로 고정돼 있을 수도 있고 발설되지 못한 이야기로 남아 있을 수도 있지만, 한 번 존재했던 것, 한 번 경험된 것은 쉽게 소멸하거나 지워지지 않는다. 인간의 삶은 유한하므로 개개인이 겪은 고난은 개인의 일신과 함께 사라지는 것 같아 보이나, 집단적 경험의 기억은 세대를 넘어 이어진다.

한 사회는 역사 속의 존재이기 때문에 집단적 기억의 공동체이며, 역사 속에서 다른 사회에 저지른 잘못에 대해 윤리적 책임공동체가 될 수밖에 없다. 집단적 부채는 공개적으로, 명확히 청산되어야 하는데, 이는 가해가 되풀이되지 않을 것이라는 피해자의 확신이 설 때에야 가능하다. 집단 사이에서도 사죄와 용서의 의식은 가해자와 피해자 서로의 존재를 더 높여주고 더 위대하게 만드는 계기가 될 수 있다. 반면, “사죄와 용서를 통해 화해합시다”라는 제안이 거부될 때 그 기억은 1차 가해의 기억 못지않게 오래 계속된다.

한일협정회담 문서가 공개되면서 일본의 식민지 지배와 전쟁피해 배상 문제가 다시 현안으로 떠올랐다. 일본은 국가 간 포괄배상이라는 원칙을 적용하여 한국정부에 이미 배상금을 지불했으므로 더 이상의 배상책임은 없다는 태도를 취해 왔다. 여러 고위정치인들이 일본의 한국 지배는 시혜였다고 주장해 온 것도 배상책임 회피 의도와 무관하지 않다.

이와 관련하여 독일의 ‘기억, 책임 그리고 미래 재단’은 좋은 참고가 된다. 독일은 2차 대전 전쟁범죄와 관련하여 전승국들과 이스라엘, 폴란드 같은 피해 국가들에 국가배상금을 이미 지급했으며 따라서 배상에 관한 법적 문제는 해결된 것으로 여기고 있었다. 그리고 개인 배상권도 일부 인정해주었기에, 나치 치하 독일기업(예를 들어 폴크스바겐)에 노동력으로 강제 동원되었던 외국인들이 배상을 받기도 했다. 그런데, 2000년에는 독일정부와 기업이 전시 피해자 배상을 위해 공동으로 100억 마르크(약 6조원)라는 기금을 마련하여 이 재단을 설립한 것이다. 재단은 유대인 말살정책의 피해자가 아니라 “노예노동 및 강제노동” 피해자, 즉 우리식으로 하면 징용 피해자에 대한 배상을 담당하는 기구이다. 특히 중부-동부 유럽 출신 피해자들이 혜택을 받게 되었다. 재단 설립 논의에는 벨로루시, 체코공화국, 이스라엘, 폴란드, 러시아, 우크라이나, 독일, 미국 정부가 함께 참여했다. 재단설립의 의도는 독일 기업과 정부가 “도덕적 책임감과 연대감, 그리고 자기존중심에서 출발하여 확고한 인도적 신호를 보내자는 것”이었다. 재단의 활동은 피해자들의 상처입은 마음을 조금이나마 달래주고 있다.

독일도 애초에는 민간인 배상에 대해 소극적이었다. 재단의 설립은 외국인 강제노동 피해자들이 국제연대를 통해 끈질기게 배상을 요구한 끝에 비로소 가능해졌다. 그 얼마 전 집권한 독일 사민당과 녹색당이 이 문제에 대해 보수정당과 다르게 접근한 것도 도움이 되었다. 이는 우리가 일본 정치집단의 보수화를 불평만 할 게 아니라, 스스로 적극적 자세를 보일 필요가 있음을 말해준다. 병력으로, 노동력으로, 위안부로 강제 동원되었던 한국인들이 일본정부나 기업을 상대로 배상을 청구할 때 재판비용을 한국정부가 지원하거나 국민 기금을 통해 소송을 돕는 문제도 생각해 볼 일이다. 일본의 양식 있는 시민·정치세력과 힘을 모아야 함은 물론이고, 동남아시아, 중국 피해자들과의 국제연대도 추구해야 할 것이다.

독일은 전쟁범죄 청산과 관련하여 국제사회의 요구에 어느 정도 부응하는 조치를 취함으로써 정상국가의 길로 나아갔다. 독일통일은 그 결과였다. 일본이 정상국가가 되는 길은 영토분쟁을 일으키고 제국주의 지배를 정당화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식민지 지배와 침략에 대해 사과하고 전쟁 피해자들에게 배상하는 모습을 보이는 데 있다. 상처의 치유 없는 화해란 불가능하다. 일본은 피해자들이 지닌 역사적 기억에 대해 진정으로 책임지는 자세를 보임으로써만, 동아시아 전체의 미래를 향해 나아갈 수 있을 것이다.

한정숙/서울대 서양사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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