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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정숙] 극단의 시대를 넘어서
[한겨레 2006-02-23 18:42]    


한 역사가는 1차대전부터 동서냉전 종식에 이르는 시기를 ‘극단의 시대’라 불렀다. 우리가 살아온 20세기를 이렇게 칭하는 데는 아마 대부분이 동의할 것이다.

몇 가지만 들어봐도 극단들은 정확히 대칭을 이룬다. 과학기술문명의 발전은 생명 살상력을 극대화하고 환경파괴를 가져왔다. 세계적으로 전 국민의 참정권이 인정됐지만, 이는 좌우익 전체주의와 국가폭력의 난무를 막아내지 못했고 때로는 그 도구로 이용됐다. 인권의 보편성이 강조되는 저편에서는 전쟁, 대량살육, 고문 등 반인륜 범죄가 자행됐다. 엄청난 부의 축적 바로 옆에서는 인간적 존엄을 무색하게 하는 빈곤의 축적이 나타났다. 빈부의 양극화는 한 나라 내부에서뿐 아니라 나라와 나라 사이에서도 심화됐다.

좌우의 극단적 이념대립도 그 하나였다. 그런데 이 대립구도에서 중핵을 이룬 것은 국가주의였다. 좌우익 대립은 다층적 억압구도(‘작은 집단 내에서의 억압, 그 위 더 큰 집단 내에서의 억압’ 등으로 이어지는 구도) 속에서 작용했으되, 그 극단적 형태는 결국 좌우익 국가주의의 대립이었다. 요즘 민족주의 비판이 확산되고 있고 민족주의에 위험성이 있기도 하지만, 민족주의가 가장 위험한 양상을 띤 것도 그것이 국가폭력과 결부되어 대내·대외적인 억압수단으로 변질했을 때다. 좌익 민족주의의 대안이 우익 국가주의일 수 없고, 우익 민족주의의 대안이 좌익 국가주의일 수 없는 것은 이 때문이다.

그런데 20세기 끝물 이래 전통적 이념구분은 경계가 모호해졌다. 러시아의 체제전환기에는 일반적으로 우파라 불려온 시장경제 옹호자들이 좌파로 불렸고 공산당 지지자들이 우파로 불렸다. 좌우익의 명칭이 뒤바뀌게 되었다는 것은, 그런 딱지를 붙여대는 일보다는 어떤 사회·정치적 주장의 내용이 무엇이고 그것이 왜 나왔으며 무엇을 지향하는지를 상황 속에서 구체적으로 따져보는 게 더 중요함을 보여준다.

최근 한국 사회에서는 해방공간을 방불케 하는 좌우 이념논쟁이 벌어지고 있다. 웬 냉전국면인가 싶다. 특히 한국 현대사 해석을 둘러싸고 논전이 치열하다. 일부 역사논쟁의 주도자들은 매우 정치화한 권력 언어를 구사하고 있다. 스탈린 개인숭배 비판운동을 이끌었던 흐루쇼프 전 소련 공산당 제1서기는 그의 이른바 ‘비밀연설’에서 한마디 말의 계속적 남발을 통해 사회 전체를 꼼짝할 수 없는 공포분위기로 몰고 갔던 스탈린 시대의 국가적 억압 메커니즘을 지적한 바 있다. 그 말은 ‘인민의 적’이었다. 누군가 이 명칭을 덮어쓰면 그가 무슨 죄를 저질렀는지 증명할 필요가 없었다. 한국에서는 그것이 ‘빨갱이’ 혹은 그 계열의 용어였고, 북쪽에서는 ‘반동분자’ 같은 게 아니었을까 한다. 그런데 바로 지금, 그 자체가 죄목이요 유죄선고여서 갖다 붙이기만 하면 죄상을 입증할 필요조차 없는 명칭을 연구자들이 다른 연구자들에게 공안검사나 된 듯한 어조로 퍼붓고 있으니 이 웬일인가.

지금은 극단적 이념대립의 시대가 아니다. 근대화 과정에서 제국주의와 좌우익의 독재 및 국가폭력이 자행됐다면 좌우 어느 한 입장에 밀착해서 이를 정당화하는 것이 역사 연구자의 임무일 수 없다. 사회 전체의 삶의 과정을 세밀히 들여다보되, 좌우 대립과 극단적 국가주의로 인한 뒤틀림과 상처를 직시하고 그것이 왜 일어났는지, 인간적 가치란 과연 무엇인지를 물어봐야 한다. 이제는 어떤 개인이나 집단도 진리의 독점자가 될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 다른 사람에게도 귀를 기울여가며 좀 조용한 목소리로 말했으면 좋겠다.

한정숙/서울대 교수·서양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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